믿음과 하나님의 능력
김동호 목사 2012.06.10. 설교
베드로전서 1:1-5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
우리 사람들이 그와 같은 복을 누리며 살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핵심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 때문이었습니다. 그 특별한 관계란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관계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그 특별한 관계가 모든 축복의 통로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와 같은 명령을 아담과 하와에게 하신 까닭은 단 하나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유지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그 하나님과 우리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기 위하여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면 네가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유혹합니다. 네가 하나님이 되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지 말고 깨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행하게도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하게 됩니다. 여기서 범죄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범죄 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아담과 하와는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누리는 권세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용서와 회개를 위하여 필요한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얼마큼 사랑하는가가 어디까지 용서하는가를 결정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극단적인 사랑을 선택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는 것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입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 앞에 용서 받지 못할 인간의 죄는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사탄도 송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이렇게 정리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아멘.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죄로 말미암은 하나님과의 관계단절이 가져온 사망과 죽음과 실패의 시스템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그 죽음과 실패의 시스템만 작동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구원과 회복의 시스템입니다.
마음에 병이 든 때도 있었습니다.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은 때도 있었습니다. 살고 싶지 않으리만큼 세상이 힘들었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도 있었습니다. 깊은 절망감에 과연 다시 내가 좋은 세상에서 웃으며 살 수 있을까 회의가 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도 다 지나가고 회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때문입니다. 모든 회복은 다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몸과 마음과 세상 속에 구원과 회복의 메커니즘을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모든 약한 것과 아픈 것과 잘못된 것들이 다시 다 회복되는 것입니다. 구원과 회복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까닭은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계속 약하고 아프고 힘들어 하는 것을 두고 보시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가 죽고 망하고 힘들어하고 아파하고 불행해 하는 꼴을 두고 보지 못하십니다.
우리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십자가에 우리 기독교의 최고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생각할 때마다 십자가가 저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읽습니다. 제가 읽은 십자가의 메시지는 ‘난 너 죽고 망하는 꼴 못 봐. 무슨 수를 쓰더라도, 어떤 댓가를 지불해서라도 너는 내가 꼭 구원하고 말 꺼야. 살려내고 말 꺼야.’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기까지 하시면서 우리를 살리시겠다고 고집을 부리시는데 어떻게 사망이 우리를 구속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실패와 좌절과 고통과 어두움이 우리의 삶을 지배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벧전 1:3-5) 아멘.
믿음 없는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죽음과 절망이 지배하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죽음은 생명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모든 절망은 희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들은 반박하실는지 모릅니다. 사람은 점점 약해져가고 있고 늙어져가고 있고 결국은 죽게 되어 있지 않느냐? 세상과 사람은 생명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질문할는지 모릅니다.
죽음이 끝이라면 그 말이 옳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끝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죽음까지도 영원한 생명을 위한 시작으로 봅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영원과 영생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 믿음 속에 소망이 있고, 소망의 근거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벧전 1:3-5) 아멘.
정말 사람들은 소망이 없어서 절망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소망이 없어서가 아니라 소망이 있는 줄을 몰라서 절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보입니다. 하나님이 보이면 소망이 보입니다.
믿음이 능력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은 당연히 힘듭니다. 어렵습니다. 힘들 땐 힘들어야만 합니다. 아플 때 아파야만 합니다. 그러나 소망으로 기다리고 버티면 그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갑니다. 세월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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